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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iz] 기업사냥꾼 만난 델, 우아하게 승리하다

관리자
2021-12-23
조회수 566

스티브 잡스가 마이클 델에게 매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때는 잡스가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났다가 최고경영자(CEO)로 복귀한 1997년. 캘리포니아에 있던 잡스는 당시 퍼스널컴퓨터(PC) 시장의 넘버2였던 델 컴퓨터의 창업자 마이클 델을 만나러 텍사스까지 날아간다. 델이 전 세계에 수천만 대 PC를 팔아 치우던 때니 델 PC에 애플 운영체제 맥OS를 좀 써달라고 사정하러 간 것이다. 잡스와 평소 잘 알던 델은 사정은 딱하지만 안 되겠다고 정중히 거절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OS에 비하면 맥OS 기반 PC는 생산단가도 비싼데 잘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OS에 대한 접근 권한까지 애플이 틀어쥐고 안 내줬기 때문. 몇 주 후 잡스는 애플 온라인 스토어 매니저들을 불러놓고 연단 뒤 스크린에 델의 얼굴을 크게 띄워놓고 연설한다. "델, 당신 내가 곧 따라잡을 거야"라면서. 지금이야 애플이 미국 주식시장 시가총액 1위이니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스마트폰도 없고, 유튜브도 없던 1990년대 말 얘기다.


1990년대 'PC왕'으로 시대를 이끌었던 델이 2021년 두 번째 책 'Play Nice But Win'을 들고나왔다. 앞서 1999년 델의 첫 번째 저서 'Direct from Dell'도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지만 20년 만에 나온 'Play Nice But Win'도 이미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등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책이 쉽고 재밌는 데다 비즈니스에 대한 인사이트도 상당하기 때문. 사실 델은 10대 때부터 사업 수완을 발휘해 20대 때 델을 창업하고 미디어에 수없이 소개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동안 어떤 인터뷰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업가의 속 깊은 고민이 책에 담겨 있다. 특히 20대에 정보기술(IT) 기업을 창업해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선 그가 아직도 현역으로서 일하고 있는 모습은 자못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와 동시대인인 IT 창업자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구글의 에릭 슈밋 등은 이미 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니까. MZ세대, 아니 그보다 어린 10대들이 창업해 큰돈을 벌고 조기에 은퇴해버리는 IT업계 관행을 돌아볼 때, IT업계에서 40년 고수가 책으로 전하는 인사이트는 더욱 귀하다.


특히 한국 기업가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가장 감동할 만한 포인트는 주주행동주의자와 맞서 싸운 델의 스토리일 것이다. 델은 2013년 미국 주식시장에서 델을 비공개 기업으로 전환했다. 상장폐지를 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과 돈을 들였고, 그러고 나서 5년 만에 다시 재상장한다. 그동안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이 끼어들었고, 델은 정면승부로 아이칸과 맞서 싸운 후 회사를 완전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이 전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이자 MBA 재무 교과서에 나올 만한 모든 지식을 망라한다.


상당 부분이 언론에 보도됐다지만 델이 직접 얘기하는 아이칸과의 싸움은 기존 언론 보도와는 좀 차이가 있다. 가령 델이 2013년 상장폐지를 결정했을 때 월가 애널리스트들과 언론은 "PC 시대의 종언과 함께 모바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PC 회사 델이 주식시장에서 사라지게 됐다"며 경영 실패를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델은 PC 시장은 죽지 않을 것이고, 더 다양한 디바이스로 변모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도 굳이 애널리스트나 언론 보도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상장 주식을 매입해서 폐지시키려면 주가가 낮은 게 좋으니까. 이 점을 알아차린 기업사냥꾼 아이칸은 델이 주주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며 경영진을 맹비난하면서 주식을 매집해 주가를 끌어올린다. 상장폐지도 못하게 하고 경영진도 내쫓아 회사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아이칸의 공격을 받은 델은 다자고짜 그에게 전화를 건다. 델의 전화를 받은 아이칸은 순간 당황했지만 시간이 되면 자기 집으로 와서 얘기나 하자며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아이칸이 살고 있는 뉴욕 호화 아파트로 찾아간 델은 예의 차린 잡담을 그만하자며 "우리 회사를 사서 어쩔 셈이냐"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아이칸은 "당신이 나가면 그 자리를 채울 경영진도 있고, 우리도 다 계획이 있다"며 즉답을 피한다. 델은 직감한다. 아이칸은 아무 계획도 없이 남의 회사를 뺏으려는 해적에 불과하다고.


기업사냥꾼 아이칸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낯선 이름이 아니다. 2006년 KT&G에 들어와서 경영권을 압박하고 1년 만에 1500억원을 들고 나간 아이칸. 당시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의 현금 많은 공기업들은 아이칸의 주요 타깃이었다. 월가에서도 창업주를 쫓아내고 회사를 차지하겠다고 협박해 특별배당을 받거나 실제로 회사를 조각내 팔아버리는 등 악명이 높다.





델은 이런 아이칸을 만나 책 제목처럼 우아하게 싸워 이기기로 한다(play nice but win). 과정은 지난했지만 결과적으로 사모펀드 기업 실버레이크와 손잡고 기존 계획보다 훨씬 더 큰돈(250억달러)을 들여 상장폐지에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도 훌륭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2013년 상장폐지 후 그는 자유를 맛봤다고 적었다. 매달 분기 실적을 맞출 필요도 없고, 주주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할 이유도 없어졌을 때 정말 홀가분한 기분이었다는 것. 언론은 그런 델에게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출된 것이라며 악담을 퍼부었지만 델은 달랐다. 다시 몸집을 가볍게 하고 뛰기 시작했다. 조립 PC로 IT 시장에 거물이 됐던 그는 이제 모든 서버는 클라우드로 옮겨갈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데이터 스토리지 및 서비스 회사 EMC와 클라우드 컴퓨팅·플랫폼 가상화 소프트웨어 회사 VM웨어 등을 줄줄이 인수한다. 이 과정에서 주주들에게서 인수·합병(M&A) 가격이 적정하지 않다는 비난을 받을 일도, 왜 지금 시점에 이런 회사 인수가 필요한지 설명할 일도 없었다. 비상장 회사가 되고 나니 의사결정이 스타트업 시절의 빠른 속도를 되찾았다. 결국 델은 5년 만에 하드웨어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회사로 완벽하게 모습을 바꾼 후에 재상장하게 된다.


요즘 스타트업들은 처음부터 엑시트(자금 회수)가 목표인 경우가 많다. 시작부터 회사 몸집을 한껏 부풀린 다음, 몇 년 내로 상장이나 매각을 해서 큰몫을 챙겨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그 돈으로 언제든 다른 회사를 또 만들어 키워 팔면 되니까. 그럼 델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기업사냥꾼에다 인수하겠다는 기업들도 나타나 괴롭히는데 왜 델은 팔지 않고 그 힘든 과정을 견뎠을까. "회사에 제 이름이 있으니까요(There is my name Dell there)". 빛의 속도로 변하는 IT업계에서 37년간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해온 한 창업가의 이야기가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한예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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